이화여대 대학원 신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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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대학원 신문 73호, 2011년 가을호

 

1. 먼저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잡년행진’이라는 말이 생소한데요, 잡년행진이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해주시겠어요? (본인 소개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잡년행진은 영어 “Slut Walk”를 한글로 번역한 단어인데요, 캐나다의 한 경찰관이 대학의 강연에서 ”여성이 강간당하지 않으려면 Slut처럼 입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라는 발언을 한 데에 분노한 여성들이 ”아무리 야한 옷을 입었다고 해도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강간은 당하는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하는 사람의 잘못이다!“라는 취지로 야한 옷을 입고 항의시위를 한 것이 전 세계로 퍼진 것이랍니다! 여성에 대한 욕으로 쓰였던 ”Slut“이라는 단어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섹슈얼리티를 가지고 여성을 이분하는 사고 방식 자체를 조롱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구요 :D

한국에선 올해 초 유난히 성범죄 이슈가 많았어요.(성범죄는 항상 많았지만 전보다 이슈화가 더 잘 되고 있는거겠죠?) 고대의대생 성폭력 사건, 현대차 성희롱 고발자 부당해고 사건, 판사의 비하 발언으로 술집 종업원이 자살한 사건, 그리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장자연 사건 등… 여기에 한국의 젊은 여자들이 ‘이대로는 안되겠다’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6월 16일에 처음으로 한국에서도 슬럿워크를 하자는 제안이 트위터상에 있었고, 날짜를 7월 9일로 정했다가 2차 희망버스와 날짜가 겹쳐서 한 주 연기했어요! 한국에서는 Slut을 ‘썅년’이나 ‘걸레’등 더 쎈 단어로 번역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잡년’이라는 단어도 한국의 현실에서는 충분히 자극적이라는 합의 하에 잡년행진으로 번역하였어요ㅎㅎ

저는 우리 학교 대학원생 @chilworl입니다. :)

2. 인터뷰어 개인적으로는 어떤 계기로 슬럿워크에 관심갖게 되셨나요? 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는지요? 참여 방식과 연관, 참여방식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세요. (잡년행진이 이전의 시위와 구분되는 것으로는 SNS를 통한 자원결사라고 입을 모아 평가합니다. 분명 트위터가 이와 같은 응집력을 도왔다고 생각됩니다만 다른 루트로 참여하신 분들도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포함하여 답변 바랍니다.)

올해 초에 대학원을 휴학하고 모 공기업에서 경쟁인턴(3개월의 인턴과정을 통해 3:1의 경쟁률로 정규직을 채용하는 신개념 리얼 서바이벌 채용게임..!)을 했는데요, 그 때 갖은 성희롱과 성추행, 간접차별을 다 당했어요. 술 따르고 러브샷 하고 치마정장입고 회사 귀빈 접대에 동원되는 등등. 여대에 다니면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성희롱과 성추행에는 누구보다 잘 대응하고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막상 제가 약자의 입장에, 특히 경쟁하는 입장에 놓이니까 너무나 명백한 상황에서도 문제제기를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 순간 저 역시 정말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난 ‘배운 여자’니까 성희롱이나 강간을 당할 일은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한국에서는 여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모든 상황에서 성범죄에 노출되어있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책임은 항상 피해자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한국에서도 슬럿워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건 반드시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트위터상에서 소식을 접한 것이고, 다른 분들도 비슷해요. 적어도 준비모임 안에서 트위터를 하지 않는 분은 없었어요. 우리끼린 서로 실명도 핸드폰번호도 모르고 트위터 아이디만 알 정도였거든요 :)

3. 서구에서는 잡년행진을 두고 올드페미니스트와 영 페미니스트들 간의 논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잡년행진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성주의 내에서도 다르고 또한 일반인들에게도 다양하게 비춰진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잡년행진에 참여하셨던 분들의 목적, 혹은 참여 동기의 다채로움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해주신다면?

잡년행진을 여자들,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이라고 보는 시각과는 달리 잡년행진 모임에는 상당히 많은 남자분들(이성애자 포함)이 함께 했어요. 강간사건에 의례 “남자는 원래 욕구가 있으니까 여자가 조심했어야지”라는 담론이 형성되는 현실에 저항을 느끼는 남자분들이 “남자라고 다 그런 짐승이 아니거든?”이라는 피켓을 들고 참여하기도 하셨구요. “꼴리는 건 본능이지만 강간하는 건 범죄”라는 피켓(물론 성충동이 본능이라는 말에도 완전히 동의할 순 없지만)은 남자참가자들이 많이 들었어요. 그 외에도 게이 참가자들은 “게이에게도 취향이 있다”. “게이임을 밝히는 게 너랑 자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었구요. 외국의 슬럿워크에도 많은 성소수자들이 함께 했구요. 결국 잡년행진은 성별/정체성을 떠나 모든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에요. 단순히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으로만 가두기에는 상당히 다른 결들이 많은.

4. 기획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다는 것은 그만큼 잡년행진의 자치성과 자발성을 부각시키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잡년행진 행사에 기획이나 예산 자체가 완전 없을 수는 없을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물론 트위터상에서 최초 제안자가 계시긴 했지만, 한 두명이 아니라 20여명정도가 자발적으로 모여서 ‘준비 모임’이라는 형식으로 행사를 함께 준비했어요.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따로 연락 없이도 명동의 ‘마리’라는 재개발-철거지역의 카페에 집결해 행사를 준비했어요. 특히 행사 직전 1주일 정도는 매일매일 마리에 모여서 춤을 연습하고 플랑을 만들었어요. 회원 명부도, 출석부도, 역할분담도 없이 정말 자발적으로 트위터상에서 의견을 주고받았구요. 이런 특수한 상황은 명동 마리라는 공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거에요. 사실 한국에서 뭔가 일을 꾸미려면 장소부터 ‘사야’ 하잖아요? 카페를 가던지 세미나룸을 빌리던지. 그런데 명동 마리는 거기에 모여있다는 것 자체가 철거와 용역의 위험에서 마리는 지키고자 하는 ‘연대활동’이자 잡년행진을 준비하는 베이스캠프가 되는 거에요. 마리에는 향린교회 청년부 등 항상 상주인원이 있으니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아도 마리에 가기만 하면 함께 일 할 사람들이 있으니 일은 매일매일 진행되는거죠. (그래서 마리에서 만난 많은 분들이 잡년행진의 취지에 공감해서 참여하고 도와주시게 되었어요.) 만약 우리가 모임 날짜를 정해서 인원 파악하고 장소를 예약하고 그 때만 만나는 식으로 일을 했다면 잡년행진이 이렇게 빠르고 활발하게 퍼질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비용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는데, 일단 후원 계좌를 열어서 기부를 받았고 잡년행진 당일에도 모금을 했어요. 금액을 밝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기부금이 120만원 정도 들어 왔고 이 중 70만원 정도가 텐트나 스피커, 재료비 등으로 지출되었어요. 남은 돈은 여성가족부 앞에서 농성 중인 현대차 부당해고사건 농성단에게 기증하였고, 나머지는 씨드머니로 삼아 잡년행진(이제 ‘잡년 행동’으로 이름을 확장하였답니다!)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에요.

5. 지난 7월 16일에 있었던 ‘잡년행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참여인원, 행진시간, 분위기, 피켓문구, 옷차림을 비롯한 직접 참여자의 반응 위주로)

http://twitpic.com/5ndih8 <-이 사진을 참고해 주세요 :)

주로 들었던 피켓은 ‘잡년이 간다’ ‘잡년이여 궐기하라’ ‘꼴리는 건 본능이지만 강간은 범죄다’ ‘너 만지라고 입은 옷 아니다’ ‘비싼 차 타고 다니면 훔쳐도 되나?’ ‘비싼 집에 살면 털어도 되나?’ 등등이에요.

6. 그렇다면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는지요? (응원하는 분들은 많았는지, 비난의 소리나 글들에 대해서도 코멘트 바랍니다.)

행사 당일 비가 많이 와서인지 프레스 외에 일반 시민의 참여나 촬영은 많지 않았구요, 프레스의 참여는 그 동안 봤던 어떤 퍼포먼스보다 많았습니다. 대한문 앞에서 춤 출때가 최고였어요. 아마 춤 추는 인원보다 촬영인원이 더 많았을겁니다. 그렇지만 잡년행진의 취지에 공감하기보다는 그저 ‘야한 옷 입은 여자들이 춤 추는 사진’을 찍어가려는 의도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 기사 제목들이 ‘여성들, 야한 옷 입을 권리 주장’등으로 뽑았더군요.

시민의 반응은 현장 반응보다는 이러한 기사에 대한 댓글로 표현되었는데 기사 관점 자체가 우리의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나온 거라서, 댓글도 ‘야한 옷 입을 권리? 페미니스트들이 점점 너무한다’ ‘너네처럼 못생긴 건 줘도 안 먹는다’ ‘한국에서 남자가 살기 힘들다’는 등의 어이없는 반응이 많았어요. 우리가 다들 보면서 ‘잡년행진 몇 번 더 해야겠네.’라고 했답니다ㅎㅎ

7.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축제성 여성주의 시위문화를 형성했다는 평도 듣고 있는데, 한국식 잡년행진의 독특한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외국과 비교하여도 좋고, 한국의 잡년행진의 특성을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한국식 잡년행진’을 말하려면 먼저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페미니즘은 한국에선 망한 브랜드다’라고 할 정도로 한국에서 여성주의를 말하기는 참 힘들죠. 여자가 ‘같은 여자지만 페미니즘은 싫어요.’라고 하면 그 여자는 개념녀로 등극 할 정도이니. 이런 현실은 요새 전방위에서 삽질 중이신 여성가족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서구의 ‘제도적 성평등(남녀 동일한 투표권 등)’을 투쟁의 과정 없이 그대로 수입하여 도입했던 우리 나라의 역사적 맥락 때문인 것 같아요. 이건 여성주의 뿐 아니라 법치와 민주주의 등 정치 제도도 마찬가지죠. 사실 우리나라가 법치국가라고 배우고는 있지만, 법치주의가 제대로 행해지고 있지 않잖아요? 근래의 예를 들자면, 경찰력이 동원되어 부산 영도를 사실상 봉쇄했던 7월 30일 3차 희망버스라던가, 8월 3일 명동 마리에서 용역들이 일반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것을 경찰이 카페 입구를 빙 둘러서서 사실상 방조하고 있었다던가 하는 일 들. 이 모든 일들이 주류 언론에서는 전혀 다루어지고 있지 않죠.

혁명을 통해 제도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선진국들과는 달리, 해방 이후 민주주의 제도는 수입되어 왔지만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단계적, 체계적인 의식화 과정-를 치루지 않았기에 제도가 국민의 의식과 생활 속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이 상황을 유시민씨는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단어로 표현했죠. 한국에서 여성주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전 한국 사회가 지금 여성주의의 대가를 후불식으로 치루고 있다고 생각해요. ‘후불제 여성주의’인거죠. 제도적으로 평등이 완성 되었네 오히려 역차별이네 하지만 여전히 직장과 가정에서 여성들은, 그리고 남성들 역시 성차별주의에 고통받고 있죠. 잡년 행진은 이런 한국의 현실을 조금씩 바꾸기 위해 지불하는 작은, 그렇지만 강렬한, 유쾌한 ‘후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8.  앞으로도 매해 슬럿워크를 계획하고 계신지요? 만약 그렇다면 잡년행진이 우리 사회에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외에 마무리하고 싶은 말)

‘잡년’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여자들이 브래지어 엮어서 줄넘기 좀 했다고 언론에선 난리가 났잖아요? 그런 기사에 달린 댓글 보셨죠? 잡년행진, 아직도 필요해요.

덧붙이는 말이 더 길어질 것 같은데.. 잡년행진 행사 이후 언론기사 대응과 진행비용 정산, 자료집 발간 등등을 위해 모인 “슬럿워크, 그리고..” 모임에서 잡년행진 당일 공연을 펼친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은 이런 행사에서 공연자들에게 통상적으로 지급했던 “공연비”를 이번엔 주지 말자고 제안했어요. 준비모임 인원과 당일 행진 참가인원, 공연자 모두가 잡년행진을 함께 꾸려왔고 꾸려 갈 것이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주도자/게스트 구분을 두지 말자는 취지였죠. 그 말에 정말 공감했던 건, 잡년행진이 제 삶에 미친 영향 때문이었어요. 개인적으로 6월은 저한테 정말 힘든 달이었어요.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스물다섯 살의 여름. 도망치듯 대학원을 휴학하고 선택했던 3개월의 공기업 경쟁인턴을 망친ㅋ 후에, 저는 대학원 복학과 취직, 유학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었지만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3개월의 경쟁과 거기서 겪은 성희롱이 제 삶의 의욕을 많이 꺾었거든요. 그 때 잡년행진 소식을 들었고,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 참여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오히려 잡년행진은 저의 페미니즘 운동/학문과 삶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흥하는 운동은 이런 게 아닐까요? 주모자와 배후세력/ 외부세력을 나눌 수 없는 운동. 모두가 뭔가 보태려고 왔다가 한아름씩 받아가는 운동, 그래서 그 움직임이 점점 퍼지고 강해지는 운동. 잡년행진, 아니 잡년행동은 그런 운동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이런 걸 느끼셨음 좋겠어요. 함께 해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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